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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석식을 먹자마자 야자실로 향한다.

그러나 석식을 먹고 바로 야자실로 가지 못하는 날이 있다.

바로, 석식 뒷정리 당번인 날이다.

 

뒷정리를 끝내고 야자실로 향한다.

사회가 뒤숭숭하다. 발걸음이 무겁다.

기말고사가 다가오는데 자꾸 쓸데없는(?)것에 신경이 쓰인다.

(2008년 여름,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시기, 여고생이 전경의 곤봉에 머리를 맞는 등.. 나라가 뒤숭숭했다.)

 

.

 

야자실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애들이 앉아있다.

공부를 하는 몇몇 빼고는 저마다 무리지어 쉬고있다.

나는 내 자리가 엉망이 된 것을 확인하고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다.

 

늦게 시작한 공부라서, 누구보다 열심히 해야 '기본'을 할 수 있다.

내가 얼마나 모자란지 알기에, 유독 유난을 떨면서 유치하게 공부를 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야자실의 책상 가림막에도 (쪽팔리지만) 공부 의욕을 자극하는 사진을 붙여놨었다.

프린트해서 책상에 붙여놨던 '하버드 대학 도서관의 새벽4시30분'이라고 유명했던 사진. (실제는 하버드 대학 도서관이 아니라고 함.)

 

공부 동기부여 메시지 여러개와 하버드 도서관 전경 사진을 인쇄해서 붙여뒀던 것이 발기발기 뜯어져있다.

책상에는 침을 뱉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액체가 꽤나 많이 있다.

 

지난번 야동 보다가 나한테 욕먹었던 놈들 중 하나이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나를 아니꼽게 보는 놈들의 소행일 것으로 추측된다. (단독 범행은 아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대응을 미적지근하게 하면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

 

누군지도 모르고, 증거도 없이 난리를 칠 수도 없는 일이고...

만약 싸움이 나더라도 같이 싸워줄 친구들도 없다.

 

그런 일에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분명한건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더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이런 XX !!!!!!!, 어떤 XXX가 내 자리 건드렸어 !!!

야 XX, 너냐? (아니!),
야, 거기 니네들이냐? (아니!)

(정적)

와, 이 XX, 뭐 이런 X같은 XX들이 다있어,
나한테 불만 있으면 나와서 얘기해 이 XXX들아. 치사하게 뒤에서 XX하지말고.

이번 건 그냥 넘어가는데,
한 번 더 이런짓 하면 그 땐 반드시 찾아내서 죽여버린다.

(정적)

진심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실제 화난 것의 3배 정도는 더 강하게 샤우팅 했다.

화를 내는 목적은 분명하다. 재.발.방.지.

 

화장실에서 휴지에 물을 묻힌 휴지를 가져와 책상과 의자를 닦았다.

 

높은 확률로 당싱에 방에 있던 놈들의 소행일거고,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 우르르 했을거다.

찌질한 놈들은 보통 혼자 있을 땐 얌전한고 여럿이 모이면 용감하게 나쁜짓을 한다.

목격자도 그 자리에 있었을거다. 다만, 나한테 제보했다가 가해자에게 보복당할까봐 침묵한거다.

 

그래서 게중에 제일 나대는 무리를 저격해서 물어봤던거다.

예상되는 놈들을 지목했을 때, 하나같이 본인들이 아니며 누가 했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본인들이 결코 아니라고 하니까 더이상 할 말이 없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한테 불만이 있는 놈들이 누구든, 일단 내 면전에선 아무말도 못하는 상황이니까.그리고 내가 지목했던 놈의 소행이 맞다면, 그가 발뺌하는 것을 모두가 봤으니까.어쨌든 분위기는 잡았으니 재발방지는 된거다.

 

실제로 나는 싸움은 못한다.팔씨름을 좀 잘하는 편이었던거지 싸움을 잘하는건 아니다.실제로 싸움이 나면, 운동 배운 친구들을 이기기 어려울거다.

 

그런데 이렇게 분위기를 잡게 되었으니, 오히려 싸우지도 않고 이긴 게 되어 이득이다.난 전학 간 학교에서 애들하고 어울릴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공부가 더 재미있으니까 공부에만 집중하고 시험 잘 보면 된다. 친구가 좀 없는것은 상관 없다. 전학오기 전 학교에 친구들 많이 있고, 대학 가서 다시 사귀면 된다.

 

왕따지만 괜찮은 이유다.